11월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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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유 블라지가 샤넬 데뷔 컬렉션을 선보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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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유 블라지가 샤넬 데뷔 컬렉션을 선보이기까지

캉봉에서 그랑 팔레까지! 샤넬 데뷔 컬렉션을 준비하고 발표하기까지 마티유 블라지의 4개월을 기록했다. JUMP UP “큰 도약을 앞둔 기분입니다.” 파리 캉봉가 31번지 샤넬 본사 건물에서 포착된 마티유 블라지. 그는 데뷔 컬렉션 발표 직전에 속마음을 고백했다. 패션은 늘 변하지만, 어떤 변화는 한 시즌의 경계를 넘어선다. 지난해 샤넬이 버지니 비아르와 작별을 고했을 때 업계 관계자들은 불안한 기대감 속에 하우스를 주시했다. 40년 가까이 샤넬은 한 사람의 비전을 구현해왔다. 칼 라거펠트다. 2019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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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봉에서 그랑 팔레까지! 샤넬 데뷔 컬렉션을 준비하고 발표하기까지 마티유 블라지의 4개월을 기록했다. JUMP UP “큰 도약을 앞둔 기분입니다.” 파리 캉봉가 31번지 샤넬 본사 건물에서 포착된 마티유 블라지. 그는 데뷔 컬렉션 발표 직전에 속마음을 고백했다. 패션은 늘 변하지만, 어떤 변화는 한 시즌의 경계를 넘어선다. 지난해 샤넬이 버지니 비아르와 작별을 고했을 때 업계 관계자들은 불안한 기대감 속에 하우스를 주시했다. 40년 가까이 샤넬은 한 사람의 비전을 구현해왔다. 칼 라거펠트다. 2019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랜 기간 라거펠트의 오른팔이었던 버지니 비아르가 그 뜻을 이어받았다. 지난해 비아르의 퇴진은 패션계 최고 자리를 공석으로 만듦과 동시에 샤넬의 미적 감각이 엄청난 변화를 맞이할 거라는 예고편이었다. 보테가 베네타에서 가죽을 활용한 놀라운 작업으로 두각을 나타낸 젊은 디자이너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는 당연한 선택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그가 아티스틱 디렉터로 선임되었을 때,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두 가지였다. 라거펠트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날 것과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것. 하우스의 미래, 나아가 21세기 패션계 운명이 블라지의 데뷔 쇼에 달려 있었다. 첫 쇼가 열리던 10월 6일 밤, 그랑 팔레의 아치형 백스테이지는 준비 작업으로 분주했다. 밝은 회색 펠트로 덮인 바닥에는 모델 이름이 순서대로 적힌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모델들은 가운 차림으로 헤어클립을 꽂은 채 서두르거나 어슬렁거렸다. “솔직히 정신이 없군요.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돌아올게요.” 오후 8시 쇼가 시작되기 40분 전, 긴장한 얼굴로 나타난 블라지는 다시 서둘러 사라졌다. 블라지는 보테가 베네타에 합류하기 전까지 조력자로서 일해왔다. 거의 20년을 ‘그림자 속에서’ 보낸 것이다. 브뤼셀의 라 캉브르(La Cambre)를 졸업하자마자 라프 시몬스에 합류한 그는 패턴 제작에 복잡성을 도입했다. 메종 마르지엘라에서 디자인한 크리스털 장식 마스크는 브랜드 아이콘이 되었다. 보테가 베네타에서는 장인 정신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모순적인 아이디어를 놀랍도록 조화롭게 통합했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구조적이면서도 유동적입니다.”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이 발표한 첫 번째 앰배서더 아요 어데버리가 그의 디자인에 대해 설명했다. “동시에 그는 모든 유형의 여성을 바라봐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이 느껴지지만, 그 드레스는 관능적일 수도 순수할 수도 있죠.” 샤넬과 오랜 기간 관계를 맺어온 니콜 키드먼은 그와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마티유를 처음 만날 때부터 느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진심이었죠.” 방 한쪽에는 네 개의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나는 홀 내부, 둘은 레드 카펫, 남은 하나는 게이트 너머로 몰려든 군중을 감시하는 드론 뷰가 펼쳐졌다. 모두가 블라지를 찾고 있다. 모델들은 줄을 서기 시작했고, 음향·영상 팀은 이어폰에 대고 속삭인다. 마침내 디자이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고 동료들에게 활짝 웃어 보인 뒤 다시 긴장 속에 숨어들었다. 특별히 걱정되는 부분은 없는데, 모든 게 걱정된다고 고백했다. “어머니는 이걸 아이를 처음 학교에 보내는 스트레스에 비유하더군요. 괜찮을 거란 걸 알면서 느껴지는 불안감이죠.” 그는 팔로 몸을 꼭 감싸며 출석 확인을 기다리는 모델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스크린과 모델들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만족감을 표하며 덧붙였다. “큰 도약을 앞둔 기분입니다.” 7월의 어느 따뜻한 수요일 저녁, 생제르맹데프레 성당 계단에서 블라지를 만났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과거 파리 성벽 너머 들판에 덩그러니 자리한 그곳은 ‘지속성의 힘’을 증명하는 장소다. 오랫동안 주변부로 인식되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 풍경에 녹아드는 것을 넘어 이제는 그 지역을 정의하는 심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블라지에게는 고향 같은 곳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습니다.” 웅크리고 있던 그가 나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나며 말했다. “아버지가 근처에서 갤러리를 운영하셔서 어릴 적부터 이곳을 자주 찾았죠.”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는 유니폼과도 같은 로고 없는 흰색 티셔츠에 내추럴 컬러 스웨터를 어깨 위로 걸치고, 편안한 실루엣의 낡은 청바지에 자신이 디자인한 섬세하게 주름진 검정 양가죽 로퍼를 신었다. 몇 년 전 보테가 베네타에서 만난 그는 젊은이들의 황홀한 일상에 고도의 정교함과 장인 정신을 끌어들인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첫 공식 행사였던 이탈리아 귀족 만찬에서 나는 그가 연설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우아함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수줍어 보였다. 당시 38세였던 그의 머리에 씌워진 보테가 베네타라는 왕관은 어지러울 정도로 커 보였다. 그로부터 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41세의 블라지는 샤넬이라는 왕관을 쓰고 있다. 더 확신에 찬 모습이다. 블라지의 짧은 갈색 머리에는 은은한 회색빛이 감돈다. 턱선에서는 확신이 묻어나지만, 눈빛에서는 여전한 갈망을 읽을 수 있다. 한때 ‘영원한 학생’이라고 묘사되던 그의 모습은 변함없다. 블라지는 여전히 겸손하고, 세심하며, 사교적이다. “창작자 중에는 끊임없이 주도하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한발 물러서서 경청하며 자신의 두뇌와 인맥, 미적 감각을 발휘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지난해 모리 미술관 전시를 위해 블라지와 협업한 경험이 있는 예술가 티에스터 게이츠(Theaster Gates)가 말했다. 압박감 넘치는 업계에서 블라지는 예술적 자유를 놀라운 상업적 성공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라프 시몬스가 표현한 대로 “인생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사람 중 한 명”이라는 평판을 유지하고 있다. 블라지가 라베 거리의 한 식당으로 안내했다. 사무실에서 풀려나 한잔하러 나온 직장인으로 북적여야 하는 시간대임에도, 네모난 녹색 격자 구조물로 뒤덮인 레스토랑은 썰렁했다. 창턱에는 인조 잔디처럼 보이는 것이 깔려 있었다. “이런 카페는 관광객에게 인기가 별로 없어요.” 블라지가 빈 테이블을 가리키며 명랑하게 말했다. “프랑스 사람에게도 그다지 인기 있는 곳은 아니고요.” 하지만 블라지에게 이 작은 식당은 완벽하다. 취향 없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워버렸을 법한 독특한 디테일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라 상테 파 라리멍타시옹(La Santé par L’Alimentation)이라는 간판이 마음에 듭니다.” 그는 문 위에 있는 이탤릭체 글자(‘음식을 통한 건강’을 뜻한다)를 가리키며 감탄했다. 특정 시대와 표현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이유다. 고리버들 의자와 인조 잔디 역시 마음에 든다고 했다. 블라지의 시선으로 보면 기이해 보이는 것들이 오히려 본질에 더 충실한 경우가 많다. 관광지 식당처럼 뵈프 부르기뇽 요리에 초를 켜놓고 한구석에서는 아코디언 연주자가 연주를 이어가는 곳보다도 말이다. 그는 작은 야외 테이블에 앉아 라벤더꽃이 담긴 작은 꽃병을 바라보며, 프랑스 사람들이 로제 피신(Rosé Piscine)이라 부르는 핑크 와인에 얼음을 가득 넣은 음료를 주문했다. 블라지는 디테일에 천착하는 사람이다. 특정 시간과 장소, 일상의 필요 때문에 생긴 그런 디테일 말이다. 그는 종종 의상 디자인을 시작하기도 전에 “컬렉션을 완성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블라지와 리서치 책임자 마리 발렌틴 지르발(Marie-Valentine Girgbal)이 수고스럽고 신중하게 수십 개 무드보드 이미지와 견본을 바인더에 모아 특정 룩으로 분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바인더는 디자인 팀에 넘겨지고, 그들은 이미지를 보며 받은 영감을 토대로 의상을 제작한다. 그런 다음 블라지와 팀은 몇 주 동안 이를 검토한 뒤 일부는 폐기하고, 일부는 한 차례 정제 과정을 거친다. 바인더는 블라지가 그리는 미래의 비전이다. 샤넬에서 그려갈 비전을 묻는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블라지는 그 답을 순식간에 떠올렸다. “샤넬은 현대적입니다.” 그는 무심코 답했지만, 그것이 어리석게 들릴까 봐 걱정했다. 이는 해석의 문제다. 샤넬에서 라거펠트 스타일이 화려하고 시크한 것이었다면, 블라지는 뚜렷한 기하학무늬와 흙빛 색감을 선호하는 개념주의자다. 보테가 베네타에서 선보인 그의 옷은 대부분 풍부한 갈색, 버터 크림을 얹은 듯한 보라색, 혹은 밝고 특이한 녹색이었다. 경호원을 거느리고 다니며 파리 저택에 식사용 별채를 둔 ‘과잉의 제왕’ 라거펠트에 비해 블라지의 취향은 한층 절제된 편이다. 그는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걷는 것도 좋아한다. 가장 선호하는 주종은 샴페인이 아니라 맥주다. 패션계 최고 직책을 맡기 위해 파리에 왔을 때, 블라지는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가구를 사무실로 부쳤고,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살 수 있는 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영원한 학생’ 블라지다운 선택이다. “마티유의 개성이 의상에 드러나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그는 샤넬과 더없이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 연구소 큐레이터 앤드류 볼튼(Andrew Bolton)이 말했다. 그는 2년 전 라거펠트의 작품을 전시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기획했다. “마티유의 디자인은 민주적이고 평등해요. 그런 부분이 샤넬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칼은 럭셔리를 통해 숭고함에 이르는 디자이너였습니다. 반면 마티유는 더 절제된 방식으로 같은 숭고함에 이르죠. 그는 일상의 미학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블라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리를 옮길지 물었다. 우리 둘 다 비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는 말보로 골드를 피우며 피신 한 잔을 더 시킨 뒤 날씨에 몸을 맡겼다. 샤넬이 그를 영입하려던 처음 몇 주 동안, 정작 본인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밝혔다. 보테가 베네타에서 회의를 끝내고 나오던 어느 날, 블라지는 스카우터에게 전화를 받았다. “정말 중요한 제안이 있다는 뜻임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블라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선임하는 일이 ‘의자 뺏기 게임’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 문득 ‘젠장, 샤넬일지도 모르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히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죠.” 블라지는 베니스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자신이 샤넬 아티스틱 디렉터직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7월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면접 일정이 잡혔다. “파리에 도착한 날은 날씨가 엄청 더웠어요. 신경 써서 차려입었는데, 스타일링이 망가질까 봐 스웨터를 벗을 수도 없었죠.”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4시간 동안 이어진 샤넬 경영진 미팅에 참석했다. 블라지는 그들이 보여준 따뜻하고 단단한 유대감과 편안한 분위기에 크게 감명받았다. “미팅을 마치고 나오며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정말 행복하겠구나’ 싶었어요.” 그는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다시 런던으로 날아가 샤넬 CEO 리나 나이르(Leena Nair)와 이야기를 나눴다. 노르망디에서 샤넬 글로벌 회장 알랭 베르트하이머(Alain Wertheimer)도 만났다. 샤넬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았다. “베르트하이머는 ‘당신이 내 앞에 있다는 건 곧 당신이 훌륭한 디자이너라는 뜻이니, 일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라고 하더군요.” 둘은 어린 시절, 가족과 예술 등 공동 관심사 위주의 대화를 나눴다. 면접이 끝나기 직전 베르트하이머가 다시 패션 이야기를 꺼냈고, 그때 블라지는 현대성에 대해 발언했다. “지금 샤넬이 현대적이라고 보나요?” 베르트하이머가 질문을 던졌다. “샤넬을 지탱하는 근간은 여전히 현대적입니다. 하지만 발전의 여지는 남아 있죠.” 블라지의 답을 들은 베르트하이머는 미소 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운전사가 창문을 내리고 프랑스 힙합 음악을 크게 틀자 블라지는 잠시 만족감을 느꼈다. “내가 될 수도 있겠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샤넬 패션 부문 사장 브루노 파블로브스키(Bruno Pavlovsky)는 버지니 비아르의 후임에 대해 매우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샤넬이라는 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천재를 찾고 있었다. “일부 디자이너는 브랜드를 옮겨 다니면서도 자신만의 비전을 고수합니다.” 파블로브스키가 말을 이었다. “샤넬이 선호하는 것은 ‘카멜레온 같은 인물’입니다.” 즉 창의적인 천재성을 발휘해 브랜드 환경에 맞춰 하우스를 되살릴 수 있는 사람이다. “마티유는 비전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마티유를 사랑하고, 그는 샤넬을 위해 모든 걸 바치죠.” 비가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블라지는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이 있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카르디날 거리와 스위스 거리를 서둘러 걸어가며 그는 자신이 샤넬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순간을 회상했다. “무서웠습니다. 밀라노의 한 생선 요릿집에 있었는데, 웨이터가 인스타그램을 보여주며 ‘당신이 내 피드에 나왔어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내가 패션계에서 일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말이죠.” 모두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힌 그는 도시를 빠져나와 이탈리아 남부에서 열흘 동안 숨어 지냈다. 두 번째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흰 줄무늬 셔츠에 회색 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우리를 맞았다. 블라지는 최근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다. 얼핏 관광객이 바글거릴 것처럼 보이는 이곳은 사실 아르누보 양식의 원형 목공예가 남아 있는, 파리에서 오래된 레스토랑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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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레어로 조리한 샤토브리앙 스테이크에 베아르네즈 소스, 프렌치 빈,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접시가 나오자 그는 음식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놀라움을 표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블라지는 이번 여름 그가 샤넬에서 완성한 작업물에 대해 만족감을 표했다. “많은 사람이 데뷔 쇼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아직 그 쇼를 정확히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전체적인 구상은 이미 끝났다고 말하면서도, 불확실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필요한 건 마법 같은 순간입니다.” 코트부터 시작하자. 남성적인(어쩌면 영국적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분위기를 내는, 트위드 소재의 스포츠 코트. 이를 여성에게 입힌다. 가위를 들고 힙라인에서부터 밑단을 자른다. 라펠을 닫는다. 단추 한두 개를 더한다. “남성적인 코트가 일순간 샤넬 코트로 변하죠.” 그는 스튜디오로 출근한 첫날, 팀과 이 작업을 수행했다. 한 세기 동안 쌓인 브랜드의 복잡한 발전을 걷어내고, 새로운 것의 원초적 충격으로 돌아가는 실험이었다. “칼은 매우 특정한 각도에서 샤넬을 바라봤습니다.” 블라지가 설명을 이어갔다. “가브리엘 샤넬의 초기 작업물 중에도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르는 디자인이 아주 많아요.” 파리의 샤넬 아틀리에에서 라거펠트가 사용하던 피팅 룸을 보자마자 블라지는 그곳에서 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유산을 이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틀리에 반대편에 있는 단순하고 현대적이며 자연광으로 가득한, 빈 캔버스 같은 방에 새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라거펠트와 비아르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코코 샤넬이 걸었던 길로 돌아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남성적인 코트를 변형시킨 작업은 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새로운 직장을 찾은 블라지는 정보 수집과 연구를 위해 샤넬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탐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 그는 전설적인 남성 셔츠 맞춤 제작사 샤르베(Charvet)를 운영하는 장 클로드 콜방(Jean-Claude Colban)과 안 마리 콜방(Anne-Marie Colban) 남매를 만났다. “그들은 제가 몰랐던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코코 샤넬이 그 가게에서 남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샀다는 사실 같은 거죠.” 아서 ‘보이’ 카펠(Arthur ‘Boy’ Capel)은 190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19년까지 코코 샤넬과 연인 관계였다. 이 일화를 들은 블라지는 당시 커리어를 막 시작한(샤넬의 창립 연도는 1910년이다) 코코 샤넬이 샤르베 매장을 방문해 맞춤 셔츠의 어깨선과 단추 열을 연구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영국 상류층 신사였던 카펠이 트위드를 즐겨 입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Ten Smiles 사진가 라파엘 파바로티(Rafael Pavarotti)의 뷰파인더에 담긴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 2026 봄/여름 컬렉션. 마티유의 집에 초대받은 모델 10명이 서로 껴안으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1910년대 초반, 코코 샤넬은 남성복을 입고 파티에 참석하곤 했다. 대부분의 다른 손님과 달리 그녀는 다음 날 아침에도 같은 옷을 입으며 남성복을 자신의 일상복처럼 착용했다. 블라지는 이 선택에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고 유추했다. “내 친구들은 모두 남자 친구 옷을 입습니다. 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를 사랑하고, 그와 가까이 있고 싶기 때문이죠.” 그는 잠시 샤넬 본인이 되어 이렇게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다른 디자이너들이 남성복을 즐겨 입던 그녀의 스타일을 연구했지만, 블라지는 이를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했다. 블라지는 코코 샤넬이 ‘남자 친구가 사주는 옷과 장신구만 지닌 여성’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녀는 말 타는 걸 좋아했고, 늘 바쁘게 움직였죠.” 코코 샤넬의 의상은 실용적인 상황에서 탄생했다. 특유의 베이지색은 저지 공급업체였던 로디에(Rodier)가 그 색상의 재고를 할인 판매했기 때문이었고, 와인색 핸드백 안감은 자신의 보석이 가장 돋보이는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블라지가 생각하는 코코 샤넬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지자라기보다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짜릿한 옷을 만든 여성에 가깝다. 특히 보이 카펠과의 관계에서 드러난 일상적 제약, 자유, 열정이 그녀의 삶에 질감을 부여했다.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샤넬도 없었을 겁니다.” 샤넬을 사랑 이야기로 풀어낸 이 프레임은 그의 일상적 개념주의가 이처럼 경쾌한 하우스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한 반박이다. 그는 사치스러운 라거펠트식 펜슬 스케치보다 아이디어의 유희에서 디자인을 이끌어낸다. 그의 아이디어는 열정과 관능, 심지어는 신체의 기억을 담고 있다. 욕망의 아이디어로 변형되지 않은 트위드는 그저 평범한 트위드일 뿐이다. 앤드류 볼튼은 마티유의 디자인을 본 뒤 코코 샤넬 특유의 친밀감과 관능미를 동시에 느꼈다고 말했다. 코코 샤넬이 주변 환경에 맞춰 디자인했다는 해석은 블라지에게도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보게 했다. 이제 블라지는 세계인이 알고 있는 ‘코코 샤넬 코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해 샤넬이 새로운 수장을 찾던 과정에서 프랑스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디자이너만이 이 지극히 프랑스적인 하우스를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파리에서 나고 자란 블라지는 이에 반발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장 나부터가 반은 벨기에 사람인걸요!” 그는 모든 종류의 지역 문화가 글로벌 문화의 일부라고 믿은 프랑스 초대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의 지론을 예로 들었다. 샤넬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오딜 프레멜(Odile Prémel)에게 코코 샤넬의 초기 코트 중 하나가 투르크메니스탄의 화려한 패턴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는 사실을 배웠다. 샤넬의 열정적인 수집가 아제딘 알라이아의 기록 보관소에서 독특한 대각선 줄무늬가 있는 옷을 연구하기도 했는데, 이는 중국 신장에서 발견된 금발 타림 미라와도 같은 놀라움을 선사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다양한 문화권의 교류가 존재했다는 증거 말이다. “그 의상은 분명 유럽을 벗어난 지역의 문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블라지는 그 옷이 페르시아 양탄자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부터 샤넬이 ‘100% 프렌치’라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오늘날 샤넬은 대부분의 럭셔리 하우스처럼 매출의 상당 부분을 아시아와 중동에서 올리지만, 무턱대고 시장에 뛰어들지 않으며 특유의 신중함을 유지해왔다. 남성복, 아동복, 홈 컬렉션을 단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커머스가 곧 미래’라는 말이 유행할 때도 샤넬은 오프라인 매장에 더 집중했다. “극도로 집중하는 것이 샤넬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최고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파블로브스키가 설명했다. 이는 사실일 수 있다. 샤넬 역시 다른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럭셔리 시장의 침체기를 경험하고 있지만(파블로브스키는 몇 년간의 급격한 성장 이후 침체기를 겪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 하락 폭은 비교적 완만하다. “샤넬 특유의 가벼움을 깊이 탐구하고 싶습니다.” 블라지에게 샤넬은 꾸뛰르에 대한 독특한 접근법을 의미한다. “꾸뛰르가 무겁거나 화려할 필요는 없어요. 중요한 건 제작 과정과 옷이 몸에 어떻게 떨어지는지입니다.” 벨기에 출신인 그는 가위를 손에 쥔 채 입체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전에는 칼이 디자인하고 아틀리에가 구현한 작품이 신성시됐죠. 아무도 그걸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루 만에 수트를 드레스로 변형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에요. 내가 처음으로 옷감과 가방을 자를 때는 모두가 깜짝 놀란 얼굴이었죠.” 그는 지금 액세서리 디자이너 크시슈토프 J. 우카시크(Krzysztof J. Łukasik)와 실질적인 오른팔인 리서치 책임자 마리 발렌틴 지르발과 함께 작업실에 있다. 블라지와 지르발은 말없이 소통한다. 블라지가 결정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면 종종 지르발을 쳐다보는데, 그녀는 눈빛 하나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호흡이 맞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라거펠트의 팀이 남성 모델과 세련된 지식인으로 구성된 내밀한 집단이었다면, 보테가 베네타에서 데려온 블라지의 핵심 보좌진은 대체로 여유로운 밀레니얼 세대의 ‘디자인 괴짜’들이다. 그들이 패션계 최대 글로벌 브랜드의 컬렉션을 위해 여기 모이지 않았다면, 지하 사무실 같은 곳에서 근사한 소규모 잡지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과 함께할 수 있어 좋습니다.” 디자인 디렉터이자 블라지의 오랜 오른팔 아르투르 다브티안(Artur Davtyan)이 말했다. “‘저게 마음에 들어’ 같은 미학적 판단뿐 아니라 컬렉션의 전체적인 방향성까지 모두 함께 결정하고 있으니까요.” 어느새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다. 지르발과 우카시크는 가방 프로토타입을 검토 중이다. 컬렉션을 시작했을 때, 블라지는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이후 팀은 에나멜을 두 번 칠한 금속 소재 가방을 실험해왔다. 별처럼 박힌 보석 장식이 돋보이는 원 모양의 ‘우주 가방’이다. 블라지는 가방을 보며 어릴 적 방문했던 천체투영관을 떠올렸다. “와우! 마음에 드나요?” 프로토타입의 걸쇠를 풀고 안을 확인한 뒤 지르발을 흘깃 보며 물었다. 지르발의 대답은 ‘예스’였다. “가능하다면 이걸 내 사무실에 두고 싶군요.” 블라지는 생각에 잠긴 듯 구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새로운 그룹이 견본을 검토하러 들어왔다. 라거펠트 시절부터 함께해온 ‘소싱 전문가’가 과거 샤넬에서 큰 성공을 거둔 스타일을 제안했다. 작은 시퀸 장식을 더한 가지색 이브닝 백이었다. 블라지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가지색은 물론, 작은 시퀸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인적인 트라우마입니다.” 그가 덧붙였다. “지난 1년간 작업한 가방 스토리보드를 한번 보시겠어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트라우마에 대해 잠시 설명할게요.” 블라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뉴욕에 살며 캘빈클라인에서 일하던 어느 할로윈, 그는 처음으로 드래그 복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작은 시퀸으로 뒤덮인 드레스였다. 그걸 입은 직후, 그는 엘리베이터에 2시간이나 갇혀 있다 소방관들의 발 위로 기어 나와야 했다. “수치스러운 귀가를 마무리하듯 호텔을 나와서도 택시를 잡을 수 없었죠.”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작은 시퀸은 절대 싫습니다.” 블라지는 작업 과정 사이사이 담배를 피우러 발코니로 향했다. 팀원들이 재정비하며 간단한 상의를 하거나 불평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바로 그런 순간에 최고위직의 고독이 생생히 느껴진다. 발코니에서 그는 리더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제나 정중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디어와 색상에 대해 논의하는 중이고, 취향에 정답이란 없으니까요. 하지만 실수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방금 벌어진 ‘작은 시퀸 사건’이 좋은 예죠. 친근하지만 단호한 리더가 되고 싶습니다. 디자이너가 아니었다면, 훌륭한 외교관이 됐을지도 몰라요.” 함께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며칠 뒤 파리 남부 외곽에 있는 몽수리 공원에서 블라지와 다시 만나 카페라테를 마셨다. 화창하고 산들바람이 부는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알레시아 거리 경사면에는 아카시아 꽃가루 뭉치가 내려앉았고, 동네 사람들은 장을 보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이곳은 블라지의 어린 시절 풍경 같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자랐고 어릴 적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곤 했다. “진정한 자유와 즐거움을 처음 느낀 장소입니다.” 10대 시절에는 근처 시립 대학에서 열리는 파티에 몰래 들어가기도 했다. “파리 같으면서도 엽서처럼 꾸며진 곳이 아니었죠.” 학업 성적이 부진하던 어린 시절, 블라지는 아르데슈 남부 숲속 지역에 위치한 마리스트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이후 영국 군사학교에 진학했다. 벨기에의 아트 스쿨 라 캉브르에서는 음악, 미술, 디자인을 함께 공부했으며, 라프 시몬스에 합류한 직후에는 갤러리 투어를 다니기도 했다. 신중하고 뛰어난 안목으로 지금까지도 다양한 예술과 패션을 수집해왔지만, 최근에는 시장 밖에 존재하는 예술에 심취해 있다. 그날 오후, 그는 협업을 계획 중인 82세의 프랑스 무대 디자이너 리샤르 페두치(Richard Peduzzi)와 만날 예정이다. “그가 출연한 팟캐스트를 마리 발렌틴이 보내줬어요.” 블라지가 설명을 이었다. “표현이 매우 섬세하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전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죠. 때로는 사람을 만나자마자 바로 통하는 경우가 있어요. 다른 분야의 크리에이터와 그런 경험을 한 건 건축가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가 마지막이었죠.” 2022년 블라지와 페셰(그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는 보테가 베네타 쇼의 세트 작업을 함께 했다. 특별한 레진 바닥이 포함된 프로젝트였다. 블라지는 샘플 제작을 위해 누군가 오길 요청했다. 그가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페셰의 오른팔인 스테파노(Stefano)라는 남자가 레진을 들이붓고 있었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블라지가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정리

알라이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터 뮐리에와 17년간 우정을 쌓은 블라지는 어떻게 ‘로맨틱한 접근’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랜 시간 몇 통의 편지가 오간 후 둘은 가까워질 수 있었다. 블라지가 그를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운 것이다. “좋은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부담감도 물론 있지만, 사랑에 빠졌거든요. 조용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보호받는 듯한 기분도 들어요.” 그는 우아한 몽수리 광장 거리로 안내했다. 여러 채의 좁은 집 정문을 지나 장미 덩굴이 드리워진 자갈길이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끝자락에서 멈춰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흰색 모더니즘 아파트 건물을 감상했다. “이곳엔 아르누보 양식이나 1880년대 시골 부르주아풍 주택이 즐비한데, 길 끝에 와서는 펑! 하고 이 르 코르뷔지에 건물이 나타나는 거죠.” 그가 감탄하며 덧붙인다. “패션을 그만두면 가이드 투어를 할 수도 있겠군요.” 몇 블록 떨어진 다른 좁은 골목길에서 우리는 또 다른 모더니즘 유물을 지나쳤다. 넓은 정면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다. 블라지는 멈추지 않고 지나치더니, 다시 돌아서서 지나친 그 건물을 바라봤다. “얼마 전 이 집을 샀어요.” 그가 수줍게 고백했다. 보테가 베네타 시절, 그는 어릴 때 살던 집 근처에 있는 독특한 저택을 구입했다. 2021년 세상을 떠난 조각가 발렌틴 슐레겔(Valentine Schlegel)이 오랫동안 소유했던 곳으로, 그는 이 예술가와 특별히 교감했다. 현재는 공동 예술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복원 중이다. 하지만 최근 구입한 집은 다르다. 블라지는 이곳을 개인 작업실로 사용할 계획이다. “숨 쉴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사무실의 압박에서 벗어나 주말에 작업할 수 있는 장소다. “마리 발렌틴도 함께 작업할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예요. 집은 사적인 공간이라 사람들을 초대하기 싫거든요.” (이 공간은 여동생과 공유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쑥스러워하며 간혹 사람들을 접대할 일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집을 재빨리 지나쳤고, 그는 다시 한번 뒤돌아보았다. “이 집에 산다는 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방금 지나온 집을 의미하는 건지, 샤넬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한마디였다. “그건 감히 꿔보지도 못한 꿈이었을 거예요.”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2026 봄/여름 쇼 초대장은 자그마한 집 모양 펜던트와 함께 도착했다. 정면에 달린 작은 렌즈를 들여다보면 내부에 새겨진 쇼 날짜와 장소를 확인할 수 있다. 세심한 관찰을 강조하는 동시에, 블라지의 프로젝트와 그를 샤넬로 이끈 가족적인 분위기의 상징인 ‘일상의 친밀감’을 부각하는 메시지였다. “프랑스어로 집(Maison)이라는 단어에 ‘주거 공간’과 ‘가정’이라는 뜻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가 설명했다. “샤넬 역시 가족 기업이죠. 함께한다는 유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이끌고 있어요. 부서 간 문은 늘 열려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비앙베이앙스(Bienveillance)’라 부르는 친절함이 존재하죠.” 이제 샤넬은 더 이상 ‘칼 라거펠트의 하우스’가 아니다. 친근하고 일상적이며 가정적인 ‘마티유 블라지의 하우스’다. Window Dressing “여러 아이디어를 시험해봐야 합니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요.” 블라지는 자신의 첫 쇼가 만족스러웠다고 말하면서도, 절대 안주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쇼 전날, 블라지는 샤넬 사무실 한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축하 꽃이 계속 도착하고 있었는데, 라프 시몬스가 보낸 거대한 꽃다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블라지는 최근 잠을 거의 자지 못했지만, 창작의 성취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의상, 룩, 쇼가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매우 기쁩니다.” 소감을 말하는 그의 뒤로 레이 찰스와 다이애나 크롤의 노래 ‘You Don’t Know Me’가 흐르고 있었다. “77가지 룩을 준비했습니다. 누구는 너무 많다고 할 수도 있고, 누구는 알맞다고 할 수도 있는 숫자죠. 여기는 샤넬입니다. 우리는 쇼를 선보여야 하고요.” 블라지는 패션쇼 자체가 하나의 ‘제스처’라고 말했다. “여러 방향으로 전개될 거예요. 아이디어를 시험해봐야 합니다. 실수도 하고 싶어요. 완벽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첫 쇼이자 첫 제안인 셈이죠.” 여름부터 그는 쇼의 주요 테마에 집중해왔다. “가브리엘 샤넬은 완전한 역설 그 자체였습니다. 남성과 동등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동시에 밤에는 유혹적인 여인으로 변신했죠.” 그가 컬렉션 룩으로 안내했다. “쇼의 첫 부분은 바로 이 역설에 관한 거예요.” 쇼의 대미를 장식할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등장했다. 단순한 흰색 티셔츠와 매치된 치마에는 라피아를 엮어 만든 다채로운 깃털과 꽃 장식이 박혀 있었다. 수작업으로 수백 시간 공들인 것이다. “매우 즐거운 뭔가가 있길 원했습니다. 꽃이 폭발하는 듯한, 플랑드르 회화 같은 느낌이죠. 이건 내 감상일 뿐이고, 우리 팀은 피나 콜라다가 떠오른다고 하더군요!” 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블라지는 쇼 당일까지 런웨이 무대를 가장 가까운 직원에게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유지하기 위함이다. 10월 6일 월요일 밤, 관람객이 그랑 팔레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시선이 향하는 곳은 천장. 천장에 매달리고, 땅속에 반쯤 파묻힌 15개의 거대한 행성이 있었다. 우주, 하늘, <어린 왕자>의 배경, 먼 과거에 대한 미래적 비전과 블라지가 어릴 적 방문했던 천체투영관이 모두 담겨 있다. 발밑에는 우주의 은하처럼 색채가 흩뿌려진 검은 레진 바닥이 깔려 있다. 매끄러운 동시에 천장에 있는 행성이 반사되는 바닥이다. 시간에 의해 타버린 표면처럼 거친 질감을 주기 위해 모래가 한쪽에 뿌려져 있다. 흡사 무한히 이어지는 듯한 모습이다. 이 표면은 블라지의 남자 친구 스테파노가 만들었다. 여름 내내 그들은 색과 형태를 시험하며 함께 다듬었다. 쇼의 모든 게스트가 걸었던 이 정교한 표면과 모델들이 걸을 런웨이 바닥은 사랑에 빠진 커플이 손수 제작했다. 결코 사소하게 넘어갈 부분이 아니다. 오후 7시 59분, 천둥 같은 박수에 이어 하프 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몇 분 후 드뷔시풍 현악기 선율이 흐르고, 그 사이로 기이한 우주의 휘파람 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조명이 어두워지자 첫 번째 모델이 무대를 가로질렀다. 남성용 회색 코트의 실루엣을 차용한 투 버튼 재킷에 깔끔하게 다린 바지 차림이다. 그가 스튜디오 출근 첫날 재단한 의상을 연상시켰다. 왼손으로 그가 재해석한 클래식 2.55 백을 들고 있었는데, 뻣뻣한 가방 안쪽에 넣은 유연한 금속을 통해 구겨지고 휘어져 ‘새롭고 낡은’ 형태로 변형시킨 것이다. “존 체임벌린 작품 같기도 하고, 자동차 사고 현장 같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아낸 가방이죠.” 블라지가 설명했다. 모델의 귀에는 까멜리아에서 출발한 뾰족한 귀고리가 달려 있다. 세 번째 모델은 코코 샤넬이 가방 안감으로 사용한 와인색 블라우스를 입었고, 네 번째 모델은 실크 블라우스와 간결한 디자인의 랩 스커트를 착용했다. 룩은 자유와 움직임을 표현하며, 이따금 다리가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몸을 가리고 있지만, 움직일 때 피부를 드러내는 여성은 무척 흥미롭고 관능적입니다.” 블라지는 이런 ‘역설적인 관능미’가 여성에게 주도권을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블라지는 쇼를 세 장으로 나눴다. 첫 번째 장인 ‘엉 파라독스(Un Paradoxe)’는 힘과 유혹을 결합한다. 빨간색 시퀸으로 뒤덮인 플래퍼 스타일의 투피스 의상이다. 블라지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작은 시퀸이다(블라지는 미소를 지으며 “마음을 바꿨다”고 밝혔다). 코코 샤넬의 ‘LBD’를 변형한 드레스 차림의 모델은 달걀 모양 클러치를 들고 있다. “달걀은 무언가의 시작을 상징하죠.” 블라지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다 갑자기 남성용 흰색 셔츠와 이브닝 스커트 조합이 등장한다. 블라지의 말대로 ‘궁극의 역설’이다. 샤르베와 협업으로 완성한 셔츠는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으로 코코 샤넬의 순수한 사랑을 떠오르게 만든다. 두 번째 장은 ‘르 주르(Le Jour)’라 명명했다. 일상, 평범한 삶을 관통하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실루엣이 더 여성적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몸에 더 밀착되는 형태죠.” 그러나 그는 소재와 구조에 혁신을 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클래식한 샤넬 수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안에 입은 스웨터와 치마가 하나로 연결된 드레스다. 모델이 걸을 때마다 허리 주변에서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춤추듯 움직인다. 런웨이에서 선보인 몇몇 화이트 드레스는 샤넬 하우스와의 결혼을 뜻하는 일종의 은유다. “옛것, 새것, 빌린 것, 우울한 것. 이 공식이 마음에 듭니다.” 다음 차례는 남성 셔츠 칼라를 차용하고 남성복 패턴에서 영감을 받은 수트다. 데그라데 기법으로 평평하게 표현해 드레스처럼 보이는 이 의상은 모순의 양면을 하나의 의복에 융합한 것이다. 블라지는 수만 개의 비즈로 해진 밑단을 장식하며, 코코 샤넬이 사랑한 디테일을 재해석했다. “귀족적인 태도입니다. 옷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그런 태도요. 편안하기 때문에 같은 옷을 계속 입는 거죠.” 그가 이어 말했다. “이건 낡아서 닳은 게 아니라, 소중히 여겨지고 사랑받은 흔적입니다.” 이 장에는 블라지의 ‘허수아비’도 포함되어 있다. 감자 자루처럼 짠 고급 면직물에, 밀알처럼 볏짚 가닥을 블라우스에 더한 디자인이다. “코코 샤넬이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배우 페드로 파스칼은 객석에서 이 의상을 보며 감탄했다. 이에 블라지가 설명을 더했다. “코코 샤넬은 노동자의 옷, 즉 움직이기 편한 옷을 귀족 계급에게 선사했습니다. 그것이 현대의 옷장이 되었죠. 하지만 그 뿌리는 궁핍한 삶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실용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 삶이죠.” 고급스러운 검정 차량에서 내린 사람들로 가득한 그랑 팔레 홀에서 그는 ‘일상적인 패션의 힘’을 절감했다. 마지막 장 ‘뤼니베르셀(L’Universel)’은 샤넬의 글로벌한 뿌리와 다원적인 현재에 대한 블라지의 헌사다. 옷에 적용한 무늬는 트위드를 ‘확대’한 버전으로, 세계 각지의 문화를 연상시킨다. 흰색부터 회색, 강렬한 주황과 빨강에 이르는 색상은 샤넬 아카이브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다. 실크 의상이 공기를 가르는 동안 음악은 프랑스 랩으로 바뀌었다. 수트가 등장하고, 밝은 라피아 꽃으로 수놓은 클래식한 드레스가 보인다. 블라지가 ‘비주 레이디스(Bijoux Ladies)’라 부르는 플래퍼 스타일 보석을 투명한 듯 얇은 트위드로 겹겹이 장식한 의상도 있다. 피날레를 장식한 ‘피나 콜라다’ 드레스를 입은 모델은 아와르 오디앙(Awar Odhiang)이다. 그녀가 무대를 떠나기도 전에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그녀는 무대 중앙에 서서 환하게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마침내 블라지가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랑 팔레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일어나 환호를 보냈다. 블라지는 오디앙을 꼭 껴안고 런웨이를 따라 달려가며 미소 지은 채 출구 쪽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그는 집까지 먼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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