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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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분노가 춤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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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분노가 춤이 된다면

프랑스 크리에이티브 컬렉티브 (라)오흐드의 공연이 남긴 것. 중요한 건 복잡한 해석이 아니라 몸의 언어,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초상이었다. Courtesy of Van Cleef & Arpels 반클리프 아펠 댄스 및 문화 프로그램 디렉터인 세르주 로랑(Serge Laurent)은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의 마지막 공연 <900 며칠, 20세기의 기억(900 Something Days Spent in the 20th Century)> 후 열린 애프터 칵테일 파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여러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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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크리에이티브 컬렉티브 (라)오흐드의 공연이 남긴 것. 중요한 건 복잡한 해석이 아니라 몸의 언어,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초상이었다. Courtesy of Van Cleef & Arpels 반클리프 아펠 댄스 및 문화 프로그램 디렉터인 세르주 로랑(Serge Laurent)은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의 마지막 공연 <900 며칠, 20세기의 기억(900 Something Days Spent in the 20th Century)> 후 열린 애프터 칵테일 파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가 이렇게 선보인 무용 공연은 물론 하이 주얼리 역시 모두 예술의 장르입니다. 그리고 예술에서 ‘만남’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관객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예술의 의미는 무척 약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모든 공연의 관객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서울 관객을 언급하자마자, 프랑스 예술가 네모 플루레(Némo Flouret)와 무용수들이 샴페인을 높이 들면서 환호했다. 그 관객의 일원이었던 나 역시 열정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 공연을 관람한 후 현대무용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다.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은 반클리프 아펠이 한국에서는 처음, 세계적으로는 여섯 번째 선보이는 무용 예술 페스티벌이다. 하이 주얼리와 무용 예술의 관계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반클리프 아펠은 브랜드 설립 초창기부터 발레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1941년에는 튀튀를 입고 아라베스크와 도약, 앙트르샤를 선보이는 여성의 모습을 담은 최초의 댄서 클립을 선보였고, 1940년대 후반 클로드 아펠(Claude Arpels)과 세계적인 안무가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만남은 그 열정을 무용 예술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젬스톤에 관한 열정을 담아 발레 공연 <주얼스(Jewels)>를 탄생시켰으며, 2007년엔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와 함께 발란신 작품 탄생 40주년을 기념하는 새로운 작품을 제작했다. 무용 세계와의 오랜 교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이 주얼리 컬렉션 ‘발레 프레시유(Ballet Précieux)’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사실 반클리프 아펠의 핵심 가치가 무용 예술과도 닮아 있다. 창작, 전승, 교육 그리고 탁월함. 이 가치는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로그램은 다채로웠다. 10월 16일 중국 타오 댄스 시어터(TAO Dance Theater)의 <16 & 17>을 시작으로 11월 8일 네모 플루레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약 3주간, 서울 곳곳에서 전 세계 9개 팀과 함께 18회 공연을 선보였고, 프로 및 아마추어 무용가 모두를 위한 워크숍과 마스터클래스 프로그램 역시 만나볼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보그> 사무실에서도 종종 공연에 대한 감상이 들려왔다. 타오 댄스 시어터의 <16 & 17>을 본 선배는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역동적인 움직임에 압도되었다고 말했고, 알레산드로 시아로니(Alessandro Sciarroni)의 <마지막 춤은 나를 위해(Save the Last Dance for Me)>를 관람한 다른 에디터는 두 남자가 무릎을 구부리고 빙글빙글 도는 장면을 바라보는 일이 이렇게 감동적일 줄 몰랐다고 털어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공연은 사랑을 고백하기 위한 춤이자 이탈리아 민속무용인 폴카 키나타(Polka Chinata)를 연구해 탄생한 작품이다.) 나는 두 편의 공연을 관람했다. 폐막작 <900 며칠, 20세기의 기억>, 10월 17일, 18일에 공연한 론(Rone)과 (라)오흐드((La)Horde)의 <룸 위드 어 뷰(Room with a View)>다. <900 며칠, 20세기의 기억>은 성수동 에스팩토리에서 진행되었는데, 공간 자체가 독특했다. 무용과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창고. 우리는 모두 서 있었고 어느 순간 관객 사이에서 무용수가 등장해 특정 동작을 반복하며 군중 사이를 가로질렀다. 필름을 공중에 던지고 깃발에 메시지를 적으면서 혼돈을 가속화했다. 애초에 춤을 위해 설계되지 않은 공간을 재해석하면서 집단적 성찰의 장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발전과 쇠퇴 사이, 잃어버린 낭만과 잔해에 저항하고자 하는 인상을 받았다. <룸 위드 어 뷰>는 더 직관적이었다. 프랑스의 크리에이티브 컬렉티브 (라)오흐드, 아티스트 론 그리고 마르세유 국립 발레단(Ballet National de Marseille)과 함께한 이 무용극은 공상과학영화 혹은 세기말 클럽을 연상시켰다. 대리석 채석장이라는 초현실적인 공간이 무대에 펼쳐졌고, 론이 디제잉하는 일렉트로닉 음악을 배경으로 무용수들은 보이지 않는 대리석에서 벗어나기 위해 격정적으로 춤을 췄다. 세상은 멸망한 듯 보였고, 초반에는 결국 체제 전복,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그게 맞든 틀리든, 그들의 감정과 의도가 읽혔고 무엇보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어떤 편견이 있었다. ‘현대무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공연장으로 들어선 것도 사실이었다. 10월 17일, 공연을 본 후 (라)오흐드에게 “(나처럼) 현대무용을 잘 모르는 관객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라고 질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했다. “현대무용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이해했느냐, 못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포스트모던이다, 아니다 같은 구분도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와인 같은 거예요. 와인을 즐기는데 원산지가 나파 밸리인지 조지아인지 따지는 건 부차적인 일이에요. 결국 결정적인 건 맛을 느끼는 순간의 경험 자체죠. 현대무용은 바로 그런 감정의 언어입니다.” 인터뷰 후 다시 한번 공연의 감정을 들여다봤다. 일상에서는 흔히 느끼지 못할 혼돈과 분노, 희망 같은 강렬한 감정이 보였다. 결정적으로는, 드디어, 현대무용을 즐길 수 있었다. Courtesy of Van Cleef &amp; Arpels (라)오흐드는 아티스트 세 명으로 구성된 ‘컬렉티브’ 개념이다.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나? 많은 사람이 “셋이 함께 작업하는 게 어렵지 않나?” 하고 묻는데, 솔직히 말하면, 자신 있게 “어렵지 않다”고 말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웃음) 대화가 키워드다. 늘 같은 식으로 의사 결정을 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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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영화를, 다른 사람은 전시를 보고, 또 다른 사람은 클럽에 가서 요즘 아티스트의 취향을 살핀다. 그다음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고 대화하면서 아이디어를 쌓아가는 식이다. 대체로 단체 작업이 타협이라고 여기는데, 우리에게 타협이란 가장 아름다운 행위다. 이젠 재미있는 놀이가 됐다. 순수한 놀이와 다른 것은 그 안에 열정과 욕망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들이 더 창의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만든다. (라)오흐드의 공연은 우리가 생각해온 무용 공연과는 다르다. ‘몸’이라는 주제를 무대 공연, 영상, 설치미술, 사진, 팝 음악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확장하는 식이다. 특정 프로젝트에 어떤 매체를 사용할지 결정하는 기준이 있나? 아주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시간을 넘나들거나 공간을 전환해야 할 경우에는 영상을 활용한다. 몸을 여러 시점에서 볼 수 있고 무용수의 움직임을 다른 차원에서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도 하는데, 더 표현하고 싶은 부분이 있을 때는 그 영화를 보완하는 각색 작품을 만든다. ‘새로운 매개체를 사용해보고 싶다’ ‘스토리를 다르게 전해보고 싶다’ ‘좀 더 다른 관객에게 다가가보고 싶다’ 혹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도 뭔가를 시도해보고 싶다’ 같은 호기심 역시 큰 동력이 된다. 이건 단순히 예술가의 믿음뿐 아니라 관객으로서 우리가 직접 경험했던 감정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은 몸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 탐구 형태는 달라지더라도 주제만큼은 분명하다. ‘정치적인 몸(The Political Body)’과 ‘유토피아적인 몸(The Utopian Body)’. 여기서 ‘유토피아적인 몸’은 이상향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이질 공간(Heterotopia)’ 개념에 가깝다. 푸코는 우리 사회 속에 학교나 병원, 공장처럼 ‘정상적인 공간’이 있는 반면, 그 질서와 규범을 비틀거나 반영하면서 다르게 작동하는 공간도 존재한다고 봤다. 몸이 가진 정치성 외에 현실의 반영이지만 실체가 없는 공간인 거울, 도시 안에 있지만 죽음을 통해 사회 밖에 있는 장소인 묘지 같은 ‘이질 공간’으로서의 몸을 다룬다는 뜻인가? 간단히 이야기하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신비를 탐구하려는 시도다. 그 속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룸 위드 어 뷰>는 1시간 15분 동안 강렬한 에너지로 무대를 채우며, 몸을 통해 성, 폭동, 평화, 화해, 연결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런 감정의 움직임을 다루면서, 스토리 성격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에 따라 미디어를 결정한다. 공연을 보면서 역동성, 자유, 평등, 전복 같은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이런 다층적인 감정을 신체를 통해 표현한다는 사실이 매우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몸이란 어떤 의미인가? 매개체이자 언어이며, 말을 초월하는 표현 도구. 신체는 역사, 감정, 사회적 역동성을 구현하고,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경험의 흔적을 담고 있다. <룸 위드 어 뷰>에서 세계 붕괴 후 인물들은 다시 다가가려 하고,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결국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동체적 에너지로 나아가려는 여정을 시작한다. 여기서 신체는 붕괴와 재탄생 장소가 된다. 그리고 몸의 움직임으로 역동성과 자유를 표현한다. 몸은 위계와 규범에 도전하는 도구이자 평등과 전복을 존재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받아들이는 수단이다. 우리는 마르세유 국립 발레단의 무용수들을 종종 ‘신체의 사상가’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짓을 통해 아이디어를 성찰하고, 질문하며, 구현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신체는 생각이 행동과 만나고, 추상적인 아이디어가 근본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곳이다. 즉 살아 숨 쉬는 세상의 반영이다.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을 통해 <룸 위드 어 뷰>를 서울 관객에게 처음으로 선보였다. 세르주 로랑의 비전 아래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과 작업한다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다. 반클리프 아펠은 우리의 창의적인 비전을 100% 실현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브랜드 자체가 예술적 대화, 혁신과 탁월함에 대한 의지가 있다고 느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페스티벌에 참여한 다양한 문화계 리더들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전체적으로 풍요로운 경험이었다. <룸 위드 어 뷰>가 서울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할 거라고 생각하나? 이 공연에는 어떤 보편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붕괴의 무대화, 집단적 봉기,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 같은 주제는 작품이 상연되는 문화적, 역사적, 도시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울려 퍼진다. 지금까지 이 공연을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선보이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공연에 공감하는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서울 공연의 감독은 이 작품을 보며 한국 역사 속 어떤 정치적인 상황이 떠올랐다고 털어놨다. 급격한 변화, 기술 발전과 전통 사이의 마찰이 혼재하는 서울에서 이 작품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공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과 집단, 통제와 혼돈, 파괴와 재구성 사이의 긴장 같은 우리 극의 요소가 많은 이중성을 구현하는 이곳에서 특히 적절하게 느껴졌다. 이런 감상은 우리에게도 무척 흥미로운데, 우리는 이 공연의 스토리를 프랑스인 관점에서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12개국 출신 무용수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각자의 상황, 다루고자 하는 주제나 개념에 따라 그들의 반응 역시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리

예를 들어 미국 무용수와 일본 무용수의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 이런 다양성이 우리가 구축하고자 하는 비전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하지만 모든 갈래 속에서도 하나의 명료한 정체성이 존재한다. 바로 감정의 춤이다. 공연에서는 폭력성이 과감하게 드러난다. 전쟁, 성폭력, 체제 전복은 물론 어떤 부분은 복수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본능인 ‘분노’에 기인하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대로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룸 위드 어 뷰>의 분노는 단순한 분노 이상이다. 극 중 인물들은 각자의 버블 속에 갇혀 개별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연결의 부재 속에 그들은 권력, 지배, 복종 같은 사회 속에 숨겨진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무용수들이 진정성과 진실성에 기반해 강렬한 감정을 온몸으로 통과시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이야기와 공명한다.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연결성은 없더라도, 이미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전쟁에 저항하는 장면이나 폭동, 불의 같은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지만,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분노, 즉 정당한 분노다. 그건 깊은 신념과 가치에 뿌리 내린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연을 어떤 나라, 어느 관객에게 선보이든 늘 강한 연결성을 부여한다.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이 사회와 맺는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겪는 보편적 경험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무용수들의 움직임 중 일부는 매우 본능적으로 보였다. 철저하게 안무에 기반한 것인가, 아니면 공연의 흐름, 댄서의 즉흥성에 의존하는 부분도 있나? 그건 정밀하게 구성된 혼돈이었다.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것처럼 짜인 안무. 모든 움직임을 상호 간의 생생한 반응, 즉흥적인 에너지를 모방하도록 세밀하게 설계했다. 이는 안무의 규율과 의도를 유지하면서도, 라이브 중 포착된 순간처럼 날것 그대로를 목격하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질서와 표면적인 혼돈 사이의 긴장이 이 작품에 강력하고 역동적인 존재감을 부여한다. 공연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초기 영감은 무엇이었나? 첫 번째는 작곡가 론의 초대였다. 론이 함께 공연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후 그 과정이 마르세유 국립 발레단으로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무용수가 누구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공연을 만들면서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다. 마지막 영감은 붕괴의 움직임이다. 여러 의미의 붕괴, 혼란과 해체를 뜻하는 붕괴부터 가부장제 붕괴까지, 다양한 층위의 붕괴를 탐색했다. ‘룸 위드 어 뷰’라는 제목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름 자체도 사실 영감의 하나였다.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창을 만들고 싶었다. 컴퓨터에 윈도우 프로그램이 있는 것처럼, 무대를 구성하는 방식이 초기 컴퓨터가 설계될 때의 구조적 사고와 비슷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초기 컴퓨터를 디자인하듯 무대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성하고, 그 안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재현하려 했다. 그리고 연극에서 흔히 말하는 ‘제4의 벽(The Fourth Wall, 관객과 배우를 분리하는 상상의 경계선. 무대 위의 인물들이 관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보이지 않는 벽)’ 안에서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또 세상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은지 살펴보고 싶었다. 팬데믹 시절 유행하던 해시태그 ‘#RoomWithAView’ 역시 영감이 됐다. 사람들이 럭셔리 호텔에서 바라본 창밖 풍경이나 아름다운 공간을 자랑하면서 붙이던 해시태그 말이다. 그 안에는 연출된 삶, 그러니까 부와 특권을 무대처럼 보여주는 문화가 담겨 있었다. 그걸 비판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특권의 과시가 클릭을 통해 소비되는 현상 자체가 호기심을 끌었다. 당시 소셜 미디어에서 트렌디한 해시태그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했으니까. 해시태그인 동시에 고전적인 뉘앙스도 있다. 제목만 봐서는 19세기 회화 같은 느낌도 든다. 공연 제목을 정할 때 늘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런 지점이다. 제목이 단서가 되어 공연 전에 관객이 특정한 관점과 기대감을 가지게끔, 공연이 끝난 후에도 새로운 해석을 더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물론 ‘분노와 화해(Anger and Resolution)’나 ‘폭동과 희망(Riot and Hope)’처럼 좀 더 직접적인 제목을 붙일 수도 있었지만, ‘룸 위드 어 뷰’는 그 자체로 훨씬 다의적이지 않나. 낭만주의 시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시적인 울림도 있다. 이 제목으로 어떤 여백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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